반응형

 

 

제주도 벚꽃 개화 시기는 3월 말이다

우연히도 딱 4.3 사건이 발생했던 이즈음이다

 

4월 2일인 오늘도 제주대 입구나 전농로에 가보면

벚꽃이 만개한 상태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나들이 갈 일 없는 노총각은 출퇴근 길에나 이렇게 벚꽃을 본다

 

근데 육지는 어떤지 모르지만 제주도는 보통 벚꽃이 만개하면

며칠 안에 벚꽃 장마가 시작되고 강한 비비람에 벚꽃잎이 후두둑 다 떨어진다

 

이승만이 보낸 토벌대의 총알에 제주도민들 쓰러지듯이

그래도 사람 발길 없는 중산간 고사리들은 잘 자라고 있겠다

 

 

 

 

몇년 전 서울 갔을 때 지하철에서 우연히 발견한 홍보물이다

 

'제주 4.3 70주년 기념 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다들 4월 1일 만우절이나 기억하고 기념하지 4.3은 모르겠거니 했는데

이게 웬일!

게다가 제주도 아닌 서울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있는 줄만 알았지 가볼 생각은 못 해봤는데 

이번 기회에 가보기로 결정!

제주도민이면 안 갈 수가 없지!

이때가 6월 20일이었으니 조금만 늦었어도 못 볼뻔했다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착

근데 오잉? 이명박?

이명박 정부가 건립한 박물관인가?

 

역사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웬일이지

이런 박물관을 다 건립하고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국정원 A 단장이 점심 먹다가 

4.3 사건 토벌대 책임을 슬쩍 언급했다고 대기발령 당한 일이 떠오른다

4.3 사건 피해자는 죄다 폭도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줄 알았는데

정권 교체의 파워인가

 

 

 

 

 

요즘 광화문 공사터에서 유적들이 발견된다고 하는데 

이 곳 역시 독립협회 창립총회 터라고 한다

의미있는 장소에 세워진 박물관이다

 

 

 

 

 

흑백 돌담과 빨간 동백꽃, 인상적인 포스터다

 

 

 

 

 

제주 출신 강요배 화백님의 글

4.3 사건에 관심 좀 있다면 모를 수 없는 강요배 화백님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기억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서울가서 출세한 제주 출신 중 4.3을 기억해주는 몇 안 되는 고마우신 분이다

 

피카소 작품보다 강요배 화백님 작품 하나 갖고 싶다

 

 

 

 

 

제주 출신 화가 강요배

 

강요배, 이름이 특이하다

4.3 사건 당시 체포 명단에 이름만 올랐다하면

동명이인은 물론 비슷한 이름까지 죄다 잡아다 죽여버리는 탓에

일부러 특이하게 지었다고 한다

형님 이름은 강거배

 

 

 

 

 

신미양요에서 광주 항일 운동까지의 역사

이 밖에도 유익한 역사 자료가 많다

자식들 데리고 오기 좋은 곳이다

 

 

 

 

 

 

4.3 사건의 원인은 뭘까

 

일제가 패망하고 미국과 소련이 자기들 맘대로 38선을 그어 한반도를 반으로 나눠버린다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의 법령과 친일파를 그대로 유지한다

미국이 친일파 순사들을 정식 경찰로 임명하니 치안이 제대로 굴러갈리가 없다

 

 

 

독일처럼 전범국이었던 일본을 분단 통치하지 않고 

엉뚱하게 일제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분단 지배한 미국과 소련

이게 바로 한반도 수백년 비극 역사의 시작이다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를 죽이고 고문하던

어마어마한 수의 친일파 순사들이 그대로 국가 경찰로 둔갑한다

 

자료를 보니 예상보다 심각하다

경찰의 80%가 친일 순사들이다

물론 정부, 군 주요 인물들도 그렇고

 

이러니 친일하면 3대가 부자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가난해지는 우리의 역사가..

 

 

 

친일파였어도 광복 후에 제 정신 차렸으면 몰라

일제 순사 출신 경찰들은 광복 이후에도 서민들에게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 안 주면 잡아가 고문하는 등 악랄한 짓을 여전히 이어간다

그냥 그러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목숨이 위험해서 친일했다'라고 주장하는 현 극우정치인들의 주장은 당연히 거짓이다

 

 

 

 

 

 

그러니 백성들의 고통과 불만이 하늘을 뒤덮기 시작한다

그래서 일제가 패망한 이후인 1947년 미군정 시대에도 3.1절에 시위가 있었다

 

친일 순사였던 경찰들이 3.1절 시위를 곱게 볼리가 없다

말을 탄 순사 하나가 어린아이를 그대로 쳐서 밟고 가버린다

 

분노한 군중이 순사에게 항의하기 시작하고 일부가 돌을 던진다

그러자 경찰들은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여러명의 도민을 살해한다

 

이 3.1절 발포사건이 바로 4.3사건의 시작이다

 

4.3사건 날짜

1947년 3월 1일 ~ 1954년 9월 21일

3.1절 시위부터 7년 넘게 무자비한 양민 학살이 진행됐다

2021년 지금의 미얀마 상황과 거의 똑같다

가해자인 당시 이승만 정부와 미국 정부에게 인간성을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당시의 기마순사와 마을 모습들

그리고 미국 신문에도 보도됐던 4.3사건

 

 

 

 

 

제주 4·3 사건

1947년 평화적인 3.1절 기념 시위에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했고
이에 분논한 도민들은 3월 10일 총파업을 일으켰다.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단체가 파견되어 파업이 진압되었고
남로당 제주지부는 이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갈등으로
제주도에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고 미군정은 군과 경찰을 강
화해 무장대 토벌에 나섰다. 1948년 8월에 수립된 이승만 정권 또한
제주도에 군 병력을 대거 파견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고 이로 인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일제는 친일파의 어머니고

미국은 친일파의 아버지고

이승만은 친일파의 형이었다

 

여기에 남로당 제주지부가 끼어들어 눈엣가시였던

친일 순사들을 죽이려고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사건이 아주 커진다

 

박정희가 활동한 걸로 유명한 '남로당'은
'남조선노동당'의 줄인말로 소련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단체다

 

 

 

 

- 경찰이 입산자의 부인을 발가벗겨 이웃 여인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총살
- 아이가 바둥거리자 아기 얼굴에 총격
- 같은 날 오후 무장대가 주민 38명 살해

이승만이 보낸 군인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이 

아이 임신부 가리지 않고 그냥 다 죽여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서북청년단?

 

미군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악행을 보여준 서북청년단

그들의 잔혹함은 나치와 KKK 그리고 일본군을 훨씬 초월했다

 

서북청년단 관련 글은 아래 참고

2018.04.03 - [제주도 이야기] - 자세히 알면 더 끔찍한 제주 4.3 사건

 

 

 

 

 

애월면 소길리

경찰이 무장대를 찾지 못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4명 총살
강경진압 작전 이후 사라진 마을이 됨

대정면 상모리 하모리

주민 48명을 도피자 가족이라하여 총살
주민 집결 후 총살극을 구경시킴

고향 동네가 바로 대정 옆이다

예전에 삼촌한테 물어보니 우리 동네는 피해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누군가 원한을 갖고 또는 이웃의 재산을 탐내서

아무런 죄 없는 이웃을 경찰에 밀고해서 사형 당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고 한다

놀랍지도 않은 인간세상 이야기다

 

우리 마을은 운 좋게 별 피해가 없어서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 같다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 총탄들

일본도, 소총 대검, 죽창에 찔려 죽은 사람도 많았고

 

 

 

 

 

이름 모를 수 많은 피해자들

 

 

 

 

 

 

철 가시 꽃
- 박경훈 -

꽃이야 꽃
혀 깨물며 죽은 땅
서슬퍼런 동리마다
산안에도 물안에도 
휘휘감겨 죽어
녹슨 우리들 가슴팍
꽃이야 꽃
가기 꽃
녹슨 꽃이야
노래야 꽃노래야
잠들어도 출렁이는 녹슨 꽃노래야

아이와 여성에게 유독 악랄했던 것을 표현한 것 같은 그림

 

 

 

 

무명천 할머니와 연좌제 증언 영상

4.3 피해자 가족은 가족의 잃은 것을 넘어

대대로 연좌제의 고통을 받았다

 

 

 

 

역사는 간단히 이해하기 어렵다

뿌리부터 천천히 살펴봐야 한다

 

카톨릭의 횡포로 발생한 이재수의 난과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만행을 겪으면서 

제주도는 외부 세력에의한 악행에 이미 질릴대로 질린 상태였다

 

광복이 되면서 이제 좀 평화롭게 사는 가 싶더니

친일 경찰들의 일제강점기 시절과 같은 악행이 계속되면서 참았던 것이 터진 것이었다

정확한 명칭은 4.3 항쟁이다

농사나 짓고 몰고기나 잡던 한 없이 약한 민중들의 작은 저항이다

 

남북 분단을 막고자해했던 통일 운동이기도 했다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밝혀진 근거가 없다

 

 

 

애국 vs 매국,, 독립운동 vs 친일파로 대립되던 일제강점기와 달리

해방 이후는 친일권력 vs 민중,, 이승만의 대통령 욕심 vs 한반도 통일의 대립이었다

 

이승만 요약

미국에 대한 환상에 젖어 미국병에 걸렸던 이승만은
1899년 고종을 폐위하려한 음모를 꾸미다 반역 죄로 사형수가 된다.
감옥에 갖혀서도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고 민영환이 도움으로 1904년 운 좋게 특사로 풀려난다.
이후 고종의 일제 침략을 막기위한 밀사로 미국에 갔으나 실패한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머물며 박사 학위딴다.
1908년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 통역을 거부하며 동포 사회로 비난을 받는다.
1913년 하와이로 가서 자신의 사제가 되길 거부하면 죽이려고 하는 등
하와이 한인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갔다.
그러다 하와이에서 독립군을 지원하던 국민회를 무력과 소송으로 장악해 분열시키고 돈과 인력을 빼았는다.
국내에선 미국 박사로 최고의 엘리트 대우를 받기 시작했고 초대 대통령이 된다.

이승만이 아버지를 죽이려했다고 증언하는 하와이 동포

 

 

 

 

동포 사회를 분열로 몰아갔던 이승만

 

 

 

 

독립군을 지원하던 하와이 국민회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해산시켜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동포를 해하고 분열시켰던 과거대로

대통령이 되어서도 남한을 이념으로 가르고 무고한 국민들을 무수히 죽였다

 

 

 

 

 

4.3 생존자 증언

9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서 사방으로 포위하고 주막 번데기로 사람들을 전부 집합시켜 놓은 거라. 그러다가 나중에 어디로 데려갈 듯 하더니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앉혀 놓고 총으로 와작착 와작착.... 난 그때 총부리가 겨드랑이로 들어가 젖가슴으로 나왔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애기 안은 채 죽은 사람들 사이에 누워져 있습디다. 죽은 사람들 위로 기름을 부어 불이 막 타고 있었어. 난 겨우 기어서....
(장병기 할머니)


군인들이 후레쉬를 들고 다니며 주민들을 집합시켰으니까 아직 어두웠던 새벽 5시께였을 겁니다. 군인들은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결박시킨 후 마치 굴비 엮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밧줄로 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한바퀴 도니까 주민 모두가 묶이게 됐습니다. 이틀 전에도 경찰과 해변마을 대동청년단이 마을에 온 적이 있지만 아무 일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은 "폭도가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했지만 누가 그걸 알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는 결박당한 채 폭도를 찾아 마을 주변을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새벽부터 굶은 채 하루종일 그 짓을 하다 오후 5시경에야 다시 주막집 앞으로 돌아왔지요. 군인들도 처음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한때 결박을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또 "사람을 일렬로 세워놓고 쏘면 9명까지 죽는다"거나, "어른은 끽소리 없이 죽는데, 애들은 두세번 앙앙 울다 죽는다"는 등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더군요. 그러다 다시 결박당했는데 나는 손을 앞으로 하여 묶였습니다. 그때 군인 한 명이 어디론가 무전을 치더니 "너흰 10분내로 총살된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연대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모양입니다. 곧 애월리 쪽에서 군인 차가 올라왔지요.

난 급히 결박을 풀어 준비하고 있다가 그들이 서로 경례하는 사이에 숲으로 뛰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식량과 이불을 덮어놓고 불을 지른 후에야 가 버렸습니다.
  - 고남보(高南普, 67세, 제주시 용담1동) 1999. 1. 22 제민일보 증언 보도



입산자 아내에 대한 성폭력은 비일비재 했습니다. 어떤 여성의 남편은 경찰이었는데 남편이 입산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친구와 친척이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 사람 또한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되어 입산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집을 감시하던 남편 친구(경찰)와 정을 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성관계를 맺으려던 순간 서북청년단이 집으로 들이 닥쳤고, 아내와 남편 친구를 벌거벗긴 채 끌어내어 수용소에 가둬 두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제 성교를 시킵니다.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심한 채찍질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하게 됩니다. 그후 서북청년단은 그 여성의 성기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안전핀 고리에 실을 묶어두고 '뛰어가도 좋다' 말합니다. 그후 그녀의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죠.
( 한림화, '4.3 당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행해진 제주여성에 대한 테러' 1998.5, 여성인권과 평화 세미나 발제문)
 

 하루는 내가 제주경찰서에서 숙직을 하는데 여자의 비명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취조실로 가보니 여자를 나체로 만들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호겸 증언, 서울시 은평구 역촌1동,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역임)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홍경토 증언,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1999, 제주4.3연구소)
  

성산포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 고성중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1998)
  

여자들인 경우 아무 근거도 없이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달빛에 얼굴을 비춰 골라 냈는데 (20세 미만의) 유독 젊고 예쁜 여자만 사상에 연루됐다는 말이냐. 성적(性的)인 문제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우리 형님과 사혼(死婚)하여 형수가 된 분은 당시 16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형수의 여동생은 당시 15세인데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왔다. 난 그분을 찾아가 여러차례 당시 상황을 물었지만 수치심 때문에 일체 말이 없었다.
 (김양학 증언, 62세, 표선면 토산리, 2002. 5. 22 채록)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이어 경찰은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폭도가족을 가려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안인행 증언, 67세, 애월읍 장전리, 2001. 8. 21 채록)

 

삼양지서가 습격을 받자 며칠간 그곳에서 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북청년회 출신 정 주임(정용철)은 너무도 잔인했어요. 여자들 옷을 벗겨 더러운 행위를 하는 것도 다 봤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날 여자들의 옷을 벗긴 채 망루 위에 오랜 시간 앉혀 놓았습니다. 난 벌벌 떠는 그들이 불쌍해 코트를 벗어 덮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삼양지서 옆 밭에서 남자고 여자고 수십명씩 잡아다 죽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쏘아 죽일 것이지 그 마을 대동청년단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도록 했습니다. 
(김제진 증언, 78세, 한림읍 귀덕1리, 제주경찰학교 10기생, 2001. 11. 19 채록)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정 주임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고봉수 증언, 79세, 제주시 삼양2동 1999. 8. 28, 제민일보 보도)

 

 

 

 

시간이 흘러 이승만 정부의 만행을 노무현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했다

 

하지만 4.3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 같다

아직도 우리 주변엔 우스운 이념으로 편을 가르고

사익을 위해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이 많다

 

역사를 외면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 역사가 재현된다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보니 한 쪽에 기념품을 파는 곳이 따로 있었다

물병 하나 구입

 

 

 

 

윤동주 서시 디자인된 예쁜 물병이다

너무 마음에 든다

 

근데 얼마되지 않아 글자가 다 벗겨지기 시작 ㅠㅠ

 

 

 

 

4.3을 되새기느라 지친 영혼을 달래려고

광화문 교보문고 핫트랙스 방문해서 오르골 구경 시작 ㅎㅎ

 

 

 

 

 

힐링되는 오르골 음악소리

 

 

 

 

 

하나 사고 싶었지만 해외 원가보다 너무 비싸서 패스

 

 

 

 

 

 

오르골 음악과 귀여운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힐링이 된다

 

 

 

 

 

 

 

마지막으로

지난 72주년 기념공연

김진호의 가족사진

 

그리고 내일이 바로 73주년이다!

 

반복되는 역사를 막기 위해서는 절대 그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4.3에 관한 예전 글도 추천

2018.04.03 - [제주도 이야기] - 자세히 알면 더 끔찍한 제주 4.3 사건

 

반응형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