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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남과 뉴에이지 (1)


피아노 첫걸음




주말 새벽이되면 자연스럽게 뉴에이지 음악을 틀게 된다.

귀에 온 자아를 집중하다보면 뭔가에 홀리듯 상상에 빠지게 된다.

뉴에이지를 좋아하는 독거남은 이렇게 불금에 술 대신 음악에 취한다.



술엔 취해본 적이 없다. 

알코올 해독력이 약한 편이라 취할만큼 마실 수 없다.

그렇기에 평소와 다른 행동, 평소와 다른 감정을 만들어내는 그 취함이 어떤 느낌일지 항상 궁금하다.




(미드 보면서 와인 한 잔은 굿)



평소에 하지 않는 말을 한다던가, 폭력적으로 변한다던가. 

나도 술에 취할 수 있다면 오버스러운 말과 행동을 할지 궁금하다.

알코올에 뇌세포가 마비되는 게 아닌 단순히 감정적인 측면에서.


하지만 뭐, 그런 취함이 꼭 알코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로맨틱한 분위기, 좋아하는 음악, 기억을 자극하는 향기, 여행 등 저마다 많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에 비해 술은 참 편하고 간단한 방법 같다.

그냥 마시면 되는 거니까. 비용도 저렴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클래식에 끌렸다.

장르를 불문하고 g선상의 아리아, 아랑훼즈, 나자리노 뭐 이런 음악들을 찾아 들으며 감성터지곤했다.

보통 남자애들과는 좀 달랐던 거 같다.


커서는 지루한 클래식보다 뉴에이지에 빠지게 됐다.






특히 이루마, 유키 구라모토, 스티브 바라캇을 제일 좋아한다.

수 많은 새벽을 이 분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아직도 노총각인 거 같다.

남들처럼 주말마다 술 마시러 열심히 쏘다녔으면 이미 결혼했을텐데.


언제부턴가 누가 소개팅해준다하면 꼭 '술 잘 안 마시는 사람'이라고 말해달라고 한다.

노처녀들은 자기보다 술 약한 남자 싫어하니까.

괜히 만날필요 없이 미리 말해주는 게 서로 시간, 감정적으로 낭비가 없다.





아무튼 독거남은 주말 새벽마다 추억이 진하게 묻은 음악과 함께하곤 한다.






이렇게 화학물질 없이 특별한 감정에 빠지려면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다.


애인과 밤바다 보면서 분위기를 잡을래도 우선 바다까지 가야한다.

바다에 같이갈 애인도 만들려면 용기있게 고백해야 하고.

모든 일이 추억이 될때까지 두 사람,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는 공짜란 없는 걸 알면서도 난 실패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유키 구라모토 제주 콘서트에 가지 못했다.

물러터진 성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러니 아직도 노총각이지.ㅠㅠ


지난 주말이었다.

 유키 구라모토 콘서트에 갈 수 없게됐다고 알게된 순간 자괴감에 온종일 멍하니 있었다.

이번이 9년만에 열린 2번째 콘서트였다.

유키상이 언제 다시 제주도에 올지 모르는데.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오래 좋아한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의 음악에 얼마나 취했었는지, 그 기억이 얼마나 특별하게 남았는지.


90년대 후반이다. 유키상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그 때가.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라 노래 한 곡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CD도 마찬가지.

그래서 곡 하나하나가 소중했고 특별했다.

그렇게 철 없던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H.O.T SES 보다 유키상의 피아노 소리에 깊게 빠져들었다.


잠들기 전마다 Romance와 Lake lousie를 들으면서 핑클, SES가 아닌 유키짱과의 국경을 뛰어넘는 로맨스를 꿈꿨다.

이런 사춘기적 몽상은 일본어 공부에 훌룡한 동기가 되기도 했다.







"아노.. 유키짱, 쯧도 스키데시다"

"우레시이네, 와따시모 스끼데스"









하지만 최초로 우리나라 TV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로 기억한다. 

피아노에 앉은 사람은 젊은 일본 여성 피아니스트 유키짱이 아니고 이마가 훤한 유키 오지상이셨다.

덕분에 그 후로는 쓸데없는 잡념 없이 음악에만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음악과 마주한다는 것은 바로 고교시절의 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감성충만한 새벽의 유튜브보다 백배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을텐데..

이렇게 유키 오지상은 물 건너 가버리셨다.







우결에서 유키 구라모토를 만나던 이윤지가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작은 피아노학원에서 유키 구라모토가 저렇게 나를 위해 연주해주면 어떤 기분일까?




연주를 해준다.

연주를 해준다..

연주를 해준다?!


8년 정도 지난 거 같다.

매일 귀로만 듣다가 직접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했던 그 때가.

좋아하는 뉴에이지 곡 하나 마스터해서 여자친구 들려주면 참 좋잖아.

우선 나 자신부터 만족이 되고.


그래서 딱히 피아노를 배울 곳이 없어 가까운 피아노 학원을 찾아갔다.

남들한텐 별거 아니겠지만 나이든 남자에게 피아노 학원은 많은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다.








정말 작고 소박한 학원이었다. 선생님은 40대 중반이셨고 보기와 달리 강한 여성이셨다.

내가 틀릴 때마다 목소리가 높아지셨다. 


꼬마애들은 혼나는 거 자꾸 구경하러 오고.

다 큰 아저씨가 반짝반짝 작은별 치고 있으니 신기했겠지 싶다.







스파르타식 교육 덕분에 피아노 실력은 일취월장이었지만 2개월로 끝났다.

곡이 점점 어려워지니 선생님 눈치가 여간 보이는 게 아니었다.

난 정말 소심한 녀석이었다.


교본 이름이 '12급 뉴바이엘 피아노 첫걸음'이었던 거 같다. 

딱 요거 하나 마스터하고 피아니스트의 꿈은 잠시 접어뒀다.





 





그로부터 몇년 후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Daum뮤직(지금은 사라진)에서 리차드 클레이더만 내한공연 이벤트를 한다고 했다.

상품이 무려 리차드 클레이더만 공연 티켓 VIP석!


다만 응모 조건이 충격이었다.


"직접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하는 영상을 찍어 보내야 응모됩니다"







나에겐 당연하게도 불가능한 미션이다.

반짝반짝 작은별이 연주 가능한 최고난이도 곡인데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라니..

테니스 한달 배우고 호주오픈 우승하라는 소리다.








그래도 이벤트 마감까지 2달이나 남았다! 


남의 연주 영상으로 사기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다시 피아노 학원 다녀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마스터하려면 13년 걸릴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왔던 그의 음악을 실제로 마주하면 진짜진짜 엄청난 순간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공연을 보고 싶단 생각에 없던 용기가 묘하게 샘 솟았다.


마침 친구의 친구 중에 피아노 학원 원장이 있었다.

친구에게 이것저것 갖다 바치며 부탁하고 부탁해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만 배우게 소개해줬다.


매일매일 퇴근하고 피아노 학원으로 출동.

하지만 아무리 2달 동안 1곡만 집중 연습한다해도 탄탄한 기초가 없으면 불가능한 곡이다.





(오랜만에 꺼내본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악보)



"여긴 안 치는 게 좋겠어요"

"이건 반만 치는 게 좋겠어요"

"이 부분은 그냥 생략하는 게 좋겠어요"

"아.. 여기까지만 치는 게 좋겠네요"


고맙게도 내 수준에 맞게 적절히 편곡해주셨다.

편곡인지 난도질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은 들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악보는 줄어들었고 결국 반토막 나버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장만 치기로 했다.


중간에 응모한 사람들 연주 영상을 보니 장난 아니었다.

자신감이 급 하락. 동정심 아니면 나를 뽑아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싶었다.


그래도 응모 마감 직전까지 매일매일 연습.


응모 결과는?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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